▲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8년에 있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포스터. 뭔가가 이상해 보인다면 기분 탓입니다. (포스터 제공: 중앙선거관리위원회선거도서관)


2012년에는 큰 선거가 두 번 있었다. 4월에는 제19대 총선이 있었고, 12월에는 제18대 대선이 있었다. 총선이 있던 4월 11일과 그리고 대선이 있던 12월 19일, 흥미로운 광경이 전국의 투표소에서 펼쳐졌다. 총선 때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위한 원탁회의’를 중심으로, 대선 때에는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를 중심으로 뜻을 모은 사람들이 청소년에게도 투표권을 줄 것을 요구하며 각자 전국에 산재한 투표소 앞에서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한국에서 투표권을 부여받는 나이는 만 19세다. 그것도 원래 만 21세가 되어야만 투표를 할 수 있었던 것이 1960년에 20세로 하향 조정되었고, 21세기에 들어와서야 2005년에 공직선거법상 투표 가능 연령이, 2007년에 국민투표의 투표 가능 연령이 조정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직선거법상 투표 가능 연령 조정 당시 만 18세 안과 만 19세 안, 그리고 현상 유지 안이 격돌했으나, 결국 만 19세 안으로 정리됐다.

선거는 하나의 상징이다. 제도적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때, ‘4대 원칙을 갖춘 선거가 주기적으로 열리는지’도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당연히 선거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선거에서 투표를 한다는 것은 가장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참정권의 기본 중 기본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만 19세가 되지 못한 청소년들은 제도상으로 완벽하게 선거의 영역에서 빠져있다. 선거법상 만 19세가 되어야만 투표권을 얻으며 만 25세가 되어야만 각종 선거의 후보로 출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청소년들은 정치적 의사를 표출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직선거법 제60조에 청소년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는 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할 수 없다. 작년에 제59조가 개정되어 SNS상에서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자유로워졌지만, 청소년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 게다가 청소년은 원칙적으로 특정 정당에 가입할 수도 없다. 물론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청소년 당원을 받는 정당도 있는데, 진보신당이 대표적이다. 통합진보당 또한 통합 이전의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청소년 당원의 가입을 받았고, 진보신당과 마찬가지로 청소년위원회도 갖추고 있었으나, 경선부정 사태가 불거지고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청소년 당원들의 당원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당원 명부를 검찰이 압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년 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랬다는 해명이 있었지만, 청소년을 정치의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 2013년 어린이날에 열린 ‘어린이날 컨퍼런스’ 모습. 어린이날은 원래 어린이들의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집회 등 정치적 행동을 함으로써 만들어졌다. (사진제공: 이장원님)


한편 청소년이 집회를 통해 의사를 표출할 권리 자체가 법으로 막혀있지는 않다. 2008년 촛불 정국 때 수많은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갔음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인 권리 또한, 대다수의 청소년들의 일상을 맡고 있는 공간인 학교의 학칙이 가로막는다. 학교 측은 학생들이 집회나 시위 등의 방식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는 데 대해 ‘학교 명예 실추’나 ‘교사 지시 불이행’ 등의 명목으로 불이익을 주겠다며 위협을 가하곤 한다. 실제로 2008년에 ㅅ고등학교에서는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학생이 학생회장으로 출마하려는 것을 학교 측에서 가로막아, 해당 학생이 인권위에 진정을 냈던 일도 있었다. 이렇게 청소년의 삶은 애초에 정치와는 완전히 유리된 상태에 놓여있다.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은 권력관계

왜 청소년은 투표권을 갖지도 못하고, 정치적인 의사 표현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정당에 가입해 정치적인 활동을 할 수도 없도록 되어 있는가? 나이가 적으면 ‘미성숙’하기 때문인가? 경험적으로, 우리는 나이가 성숙함을 보여주는 척도로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이가 많아서 ‘성숙’하다고 할 것이라면, 1941년생으로 올해 73세가 되시는 이명박씨나 그의 형님인 1935년생 이상득씨는 모든 판단을 완벽하게 내릴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분들은 ‘도덕적으로 완벽’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완벽’한, 그야말로 성숙의 극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청소년이 정치를 알기에는 미성숙하다”라는 생각은, 사실은 그 근거가 희박한 편견일 뿐이다. 일단 생물학적으로는 만 15세 정도면 ‘성인’의 뇌와 거의 유사할 정도로 성장한 뇌를 갖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20대가 지나가면 오히려 뇌는 조금씩 퇴화하기 시작한다고도 한다.

설령 청소년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미성숙’하다고 해도, 이것이 청소년의 참정권을 가로막아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만일 ‘충분히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정권을 가질 수 없다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나이이기 때문에’ 참정권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감히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남의 ‘판단력 수준’을 평가한단 말인가? 전국민을 상대로 ‘뇌 기능 수준’을 평가하는 검사라도 벌이겠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이런 주장은 무의미하다. 참정권은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다. 단지 이것이 일종의 편견 때문에 가로막혀야 한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가 그만큼 후진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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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신당 청소년위원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정치조직이다. 사진은 2012년 노동절 행진 때 등장한 피켓.


독일에서는 선거권이 만 16세부터, 피선거권이 만 18세부터 주어진다. 독일에서는 10대나 20대의 나이로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며, 실제로 19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도 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악의 축’으로 지목했던 이란은 15세,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가 16세, 심지어 북한조차도 17세부터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전혀 민주적인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북한에서의 선거권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거권이 충분한 의미를 가질 만큼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논외로 한다 해도, 특정 나이를 기준으로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

‘성숙’과 ‘미성숙’을 가르는 것은 사실 권력관계가 대단히 깊게 개입된 문제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처음으로 선거권을 손에 쥐었던 이들은 극히 일부의 부르주아 남성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여성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서민들은 ‘국가에 충분히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므로’ 참정권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인 귀족, 자산가 등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지다가 1918년에 시민대표법이 제정되어서야 비로소 만 21세 이상 남성들과 30세 이상의 여성들이 ‘성숙함’을 인정받았고, 성 구분 없는 보통선거권은 1928년에야 확립되었다.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이 ‘미성숙한’ 존재였다. 지금, 여성이나 서민, 흑인들을 이런 식으로 차별하며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청소년의 참정권 요구는, 여성이나 유색인종이나 서민들이 당대의 지배계층이었던 남성, 백인, 부유층에 대해 참정권을 요구하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혹자는 청소년에게 표가 주어진다면 그들의 표가 누군가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거나, 혹은 뚜렷한 주관이 없이 아무에게나 던져지거나, 또는 포퓰리즘에 쉽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에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되물어보자. 과연 지금 유권자들, 그러니까 ‘성인’들의 정치는 어떤가? 뉴타운에, 혹은 자신에게는 얼마 돌아가지도 않을 감세에, 토건 정책에 표를 준 것은 포퓰리즘인가 아닌가? 아이돌 가수 같은 이가 후보로 나서면 청소년들은 죄다 그를 찍을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들린다. 하지만 그렇게 비아냥대는 성인들은 공당의 전략회의를 도청한 한선교를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로 재선시켰고, ‘데칼코마니의 영웅’으로 돌아온 ‘태권도 영웅’ 문대성을 당선시켰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지금 유권자들의 표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한선교나 문대성을 당선시킨 유권자들을 비난할 이유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투표를 했을 뿐이다. 시민은, 설령 그 결정이 현명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킬 권리를 갖는다. 또한 선거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여러 정치 영역에 참여해 목소리를 낼 권리도 갖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정치 영역에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1인 1표의 대의제 민주주의다. 자기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을, 혹은 자신에게 유리한 공약을 제시하는 사람을 대표자로 내세울 권리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 여기에서 청소년과 ‘성인’이 구분되어야만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대표자를 내세울 수도 없고, 자신이 대표자가 될 수는 더더욱 없으며, 정치적 의사표현의 자유마저 제한당하고 있다. 다원주의를 기본적인 가치로 삼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느 한 집단의 목소리가 전혀 정치 영역에 나오지 못하는 것은 재앙에 가까운 것이다.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정치 영역에 나오지 못함으로써 정치권은 청소년과 관련된 정책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순전히 ‘성인’들의 시각에서만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청소년이 그 직접적인 이해당사자가 되는 교육감이나 교육의원 선거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자살하지 못하게 창문을 조금만 열리도록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이가 교육감으로서 교육정책을 집행하고 있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탈꼰대’, 청소년에게도 정치를!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원의 ‘꼰대질’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장유유서의 신화와 입시 문제를 끼고 있다. 나이에 따른 권력 서열이 정해져있다 보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대뜸 반말을 던지는 것은 일상다반사, 동등한 입장에서의 토론 또한 이루어지기 어렵다.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네가 뭘 안다고…”로 시작되는 ‘꼰대질’이 날아든다. 독일의 청소년들이 김나지움(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독일의 교육기관)에 방문한 정치인들과 정치 이야기를 나눌 때에 한국의 청소년들은 9월 평가원 모의고사 문제지 속의 미적분과 씨름한다.

4월 총선이 끝나자마자 한때 “20대, 특히 여성의 투표율이 낮다. 너희들에게 정말 실망했다.”라는 식의 글들이 SNS를 타고 떠돌아다녔다. 물론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였고, 곧 출구조사 표본을 바탕으로 한 연령별 투표율 집계가 나오자 쏙 들어가 버렸다. 12월 대선이 끝나자마자 이런 비난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출구조사 결과 20대 투표율이 65% 정도였는데, 50대의 89.9%와 비교하면 매우 낮다, 젊은이들이 잘못했다, 라는 식이었다. 청소년에게 투표권도 안 줘, 정치적 발언도 못하게 막아, 뭐라도 할라치면 나이와 입시 얘기로 가로막아, 이러다가 갑자기 만 19세가 되자마자 “투표 안 하면 개새끼!”라는 소리들을 하는 것이다. 청소년이 대체 뭘 했다고. 아니, 청소년이 대체 뭘 ‘할 수 있었’다고. 최소한 권리는 줘놓고, 그리고 그 권리를 쓰는 방법은 알려줘 놓고 뭔 소리라도 해야 맞는 순서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청소년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논의가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투표 가능 연령을 다시 좀더 낮추는 작업도 이뤄져야겠지만, 그보다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청소년은 결코 정당 가입이나 정치적 의사 표출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부분부터 고치는 것이다. 청소년 활동가 ‘검은빛’씨는 “정치라는 것은 사실 국회의원을 뽑는 것만은 아니에요. 발언을 하는 것, 의견 표출 자체가 정치이고, 굳이 선거권 연령에만 논의가 국한될 이유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투표권 연령에 관한 논의는 사실 ‘적정 연령’에만 매몰되어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치는 선거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선거는 정치의 아주 조그만, 부차적인 영역에 불과하고, 진짜 정치는 평소에 이루어지는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 정당 활동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청소년에게, ‘진짜 정치’의 장이 열려야 한다. 그것이 ‘진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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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숙과 미성숙, 애매~합니다잉~? (2012년 1월, 아수나로 전주지부 청소년 인권 아카데미에서)


<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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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도서관 2013 '공정무역-대안 혹은 함정' 자료집 서문) 


대형 뉴스들이 연일 쉬지도 않고 터져대는 통에, 평범한 잉여 1’은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붕괴 사고’, ‘포스코 왕상무 라면 사건에서부터 편의점주 자살 사건’, ‘남양유업 욕설우유 사건을 지나,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에 이르기까지. 죄다 이라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권력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사람 셋이 있으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권력관계.

 

너는 악마가 되어가고 있는가?

 

권력이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어떤 행위를 하게끔 강제하는 힘을 말한다. 어떤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해야 해서한다면, 그것은 권력이 작용한 결과다. 당신이 밤을 새워 알바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쓸 돈을 마련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밤을 새워 과제를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점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은 일상 속의 사소한 부분에까지 드러나고, 사람들을 옭아맨다. 그리고 이 권력은 그대로 점점 아래로 아래로 뻗어나가, ‘’, ‘을 거쳐 ’, ‘에까지 이르게 된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열 단계 짜리 계층구조의 완성. 이 계층구조의 특징은, 중간에 끼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악마가 될 것을 강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국주의 시절에, 유럽 열강들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 대규모 커피 플랜테이션 농장을 만들어두었다. 유럽의 식민지였던 이들 국가에서 생산된 커피들은 그대로 식민 종주국으로 옮겨가 유럽인들의 기호음료가 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에 식민 종주국들은 식민지를 더 이상 경영할 수 없게 되었고, 식민지들은 독립했다. 하지만 커피나 바나나, 카카오 등, 식민 종주국들이 필요로 하는 자원들만 생산하도록 만들어진 산업구조를 가졌을 뿐인 식민지 국가들은, 당장 커피, 바나나, 카카오를 키워 국제 무역 시장에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에 놓였다. 이것이 식민 종주국들의 ‘100년 동안의 진심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고통을 받은 것은, 커피나무 몇 그루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농민들이다. 막 수확한 커피 체리를 거래하는, ‘코요테라 불리는 소규모 중간 거래자는 먹고 살기 위해 농민을 쥐어짜고, 조금 규모가 있는 커피 가공업체는 코요테들을 쥐어짜고, 크라프트, 네슬레와 같은 거대기업은 이들 가공업체들을 쥐어짠다. 다같이 악마가 되어가고 있다.

 

아름다운것과 의외의 사실

 

국제 사회는, 농민에게 농산물의 제값을 지불하는 공정무역이 대안이라고 외쳤다. 네슬레, 크라프트와 같은 거대기업이 끼어드는 중간 유통구조를 생략해, 4천원 짜리 아메리카노 한 잔 중에서 고작 20원 꼴에 불과한 농민 몫을 크게 높이자는 것이 그 운동의 일환이었고, 이렇게 중간 과정을 생략한 커피들을 우리는 시중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서울시청 건물 한 쪽에 마련된 시민청이라는 공간에는 공정무역을 거쳐 온 커피, 캐슈넛, 초콜릿들을 판매하는 공간이 있고, ‘무한도전에 나와 화제가 됐던 공정무역 커피숍 ‘Think Coffee’와 같은 곳도 있으며, 한국외대 생활도서관은 그동안 매 축제 때마다 공정무역 제품들과 유기농 국산 차들을 판매하는 생태찻집행사를 해왔다.

하지만 이것이 아름다운그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일까? 이렇게 하면 정말 공정사회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일까? 철학자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공정무역과 같은 것들은 단지 소비자들로 하여금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들고, 본질적인 면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우리가 착해지기 위해’, ‘아름다워지기 위해커피를 마시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공정무역 제품을 소비한다는 것만으로 나는 악마에 협조하지 않는다!”라는 알리바이을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이 국제적인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관계를 개선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던 걸까? 아무래도 쉽게 결론이 나지는 않는다.

 

작은 마음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를 밟거나 쥐어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구조 속에 있다.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구조 속에서, 우리는 이나 은 고사하고, ‘이나 정도만 되어도 행복할 것 같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한국외대 생활도서관의 공정무역 - 대안 혹은 함정이라는 기획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지금 행해지고 있는 커피 무역의 문제점을 파악해보고, 그 대안으로 제시된 공정무역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공정무역이 정말 대안이 될 수 있는지, 혹시 함정카드는 아닌 건지 파악해 어떤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지 고민해보며, 이 구조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공정한방향으로 바꿀 수 없을까, 하는, ‘작은 마음으로.

그러니까, ‘나는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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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3 작성)

작년 9월, 박정근이라는 이름의 한 사진가(라고 쓰고 ‘트위터 명망가’라고 읽는다. 아니, ‘망명가’인가?)는 갑자기 트위터에 지금 자신이 운영하는 사진관과 집에 경찰들이 몰려와 압수수색을 하고 있으며, 자신은 피씨방으로 피신해 몰래 이 글을 쓰고 있다, 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당시 그를 팔로우하고 있지 않던 나는 한참 뒤에, 리트윗된 것들을 보다가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뭐가 뭔지,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트위터 타임라인을 지켜보며, 이곳저곳의 정보를 취합해보며 겨우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의 죄목은, 어처구니 없게도,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아아, 국가보안법이라니, 내가 느낀 감정은, 뭔가 7080 스타일 복고풍 배바지 패션을 강의실에서 본 것과 비슷하달까, 한 기분이었다. 아, 세상에! 그러나 또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경찰이 사진관과 집을 탈탈 털어 압수한 물품들 중에는 ‘오답 승리의 희망’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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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수물품 목록. 오답승리의희망 제10호가 보인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전에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전부터 국가보안법의 폐해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연히,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해진 상태이겠거니, 생각했다. 물론 요즘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은 있었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던 ‘무슨무슨 간첩단’ 사건들, 특히 최근에 있었던 ‘왕재산 간첩단 사건’과 같은 일들은, 국가보안법이 아직은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사건 소식들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바보처럼, 그런 사건들은 뭔가 북한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거 아닌가, 하고만 생각했고, 나 같이 별 거 없는 평범하디 평범한 소시민들과는 별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국가보안법은 1907년에 통감부가 조선인들의 자강운동이나 독립운동을 봉쇄할 목적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해 제정하게 한 ‘조선통감부 보안법’이 그 시초다. 언론의 자유를 송두리째 박탈한 ‘신문지법’과 함께 조선인들을 억압한 대표적인 법이었는데, 대한 자강회와 같은 수많은 조선인 단체들이 이 법의 철퇴를 맞고 해체됐다. 3·1 운동도 보안법에 의해 강력한 탄압을 받았는데, 유관순 열사의 죽음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1925년에 제정된 치안유지법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었다. 일본에서 처음 제정되어 조선에도 적용된 이 법은,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의 상황에 찬동하지 않는 모든 이를 ‘반체제주의자’로 몰아 형무소에 가두거나 사형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치안유지법은 해방 직후에 폐지됐지만, 한국에서는 곧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이것은 당시에는 농민, 서민층에서 널리 유행하던 사회주의 계열의 사상을 탄압하는 데 쓰였고, 군부 집권 시기에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17대 국회에서 거대여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고 공언했고 당 내에서 여러 가지 논의가 이루어진 바 있으나, 결국 국가보안법 폐지안은 국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하고 묻히고 말았다. 오히려 참여정부 기간에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된 사람들이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아마 별로 폐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국가보안법 제1조 1항)라는 미명 하에, 정권에 조금만 거슬려도 잡아넣을 수 있으니, 집권 여당 입장에서는 얼마나 편리한가!


박정근은 대체 무엇을 잘못해서 압수수색을 받았던 걸까? 경찰 측에서는 “북한 관련 트위터를 리트윗하는 등 북한의 주의·주장에 동조하는 점 등 국가보안법 위반에 혐의를 두고 압수수색했다”(한겨레, 2011년 9월 23일 보도)라고 밝혔는데, 박정근이 한 것이라곤 북한의 대외 선전용 트위터 계정인 ‘우리민족끼리’가 올리는 별 쓸데없는 내용들을 리트윗하고, “장군님 만세!”와 같은 트윗을 몇 번 했던 게 전부였다. 누가 봐도 그것은 농담이거나 조롱이었고,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누가 봐도’ 그랬다. 그랬기에 그가 압수수색을 받고 스트레스성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그 상황에서도, 사실 그게 실제로 구속이나 실형까지는 이어지지 않고 그저 거기서 끝나겠거니,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박정근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압수수색 이후로 그는 몇 번의 경찰 조사를 받았고, 여전히 북한과 관련된 농담을 했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고,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국가보안법을 조롱하고 폐지를 요구하는 행사 ‘뉴타운 간첩파티’를 열었다. 12월 3일에 백여 명의 간첩(?)들이 모여서 신나게 노래하고 춤추고 “김정일 만세”, “장군님 만세”를 외쳤다. 물론 그 김정일은 어느 기업인 ‘김정일’씨, 장군님은 ‘이순신 장군님’이었다.


“나도 박정근이다!”를 외치며 박정근의 사진을 자신의 프로필 사진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시 자신의 원래 사진으로 돌아갔고, 박정근은 트위터로 여전히 신나게 떠들었고, 연말을 장식했던 서울 학생인권조례 문제, 동국대 구조조정 문제 등이 새롭게 타임라인을 덮었고, 박정근에 대한 추가 조사도 없었고, 그렇게 해가 바뀌었다. 일은 이렇게 슬금슬금 묻히는 듯했다. 아니었다. 2012년 1월 10일, 난데없이 그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으니 법원에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구속영장에 적힌 ‘범죄사실의 요지’ 부분이 또 그렇게 멋들어진 명문이었다.


피의자는 2010. 3. 21. 트위터에 'seouldecadence' 라는 아이디로 계정을 개설하여 북한 조평통에서 체제 선전,선동을 위하여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 트위터, 유튜브 등에 접속 이적표현물 384건을 취득,반포하고, 북한 주의,주장에 동조하는 글 200건을 작성 팔로워들에게 반포하였으며, 학습을 위하여 이적표현물인 북한 원전 '사회주의문화건설리론'을 취득 보관함.


여기서 말하는 ‘이적표현물’이라 함은 트윗을 말하는 것이고, 작성, 반포했다는 글 200여 건은 그가 작성한 트윗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사회주의문화건설리론’이라는 책이 얼마나 대단한 책인가 하고 구글에서 검색해봤더니, 딱 하고 바로 나온다. 사회 과학 출판사에서 발행했고, 1985년에 발간됐으며, 총 259페이지로 되어 있단다. ‘자주 나오는 단어 및 구문’도 정리돼 있고, 심지어 관련도서들은 물론 키워드를 넣으면 본문 어디에 쓰였는지 검색도 해준다! 좀 더 검색해보니 헌책방에서도 거래되고 있는 모양이다! 심지어 대학 도서관에도 있는 책이란다! 하기야, 오승희도 이적표현물로 의심 받아 압수됐던 물품 중 하나였으니, 이적표현물이라는 표현이 뭐 그리 대단해보이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어쨌거나, 이 와중에도, 솔직히, 구속영장은 기각되고 박정근은 다시 별 일 없이 트위터를 계속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박정근 본인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저녁 7시 무렵, 그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고, 그는 그 길로 곧장 구속됐다.


그는 평소에 북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트위터에서도 북한과 관련된 농담과 함께 북한 체제를 조롱하거나 비판하는 트윗을 자주 올렸다. 도대체 아무리 봐도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이라고 볼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이건 무슨 의도로 쓴 거냐”라고 묻는 경찰에게 “농담이었다”, “장난이었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고 했다. 평양냉면을 예찬하고, 평양 현지의 맛을 궁금해하는 트윗이 대체 어떻게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한단 말인가? 그 정도로 위태로울 국가 안전이라면 우리 나라는 진작에 골백번도 더 망했어야 맞는 것 아닌가?


물론 정말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 이를테면 국가기밀을 수집해 팔아넘긴다거나 하는 행위를 한 경우라면 당연히 잘못된 것이고 처벌받아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단순히 몇 마디 말을 했다고 해서 처벌한다는 것이, 헌법에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나라에서 온당한 일인가? 고작 몇 마디의 말이 국가의 존립에 큰 위해를 가할 수 있는가? 당장 국가보안법 제1조 2항만 봐도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조항, 지켜지고 있나?


어떤 이들은 “분단국가라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은 조용히 잘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라며, 국가보안법은 필요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단국가라는 현실이 모든 인권 침해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국가보안법이 북한을 바로 알고 대응하는 데에 지장을 주어 국가안보에 방해가 된다”라는 주장도 있다. 국가정보원이라는 조직이 김정일의 사망 소식을 조선중앙방송의 보도를 통해서야 겨우 알았다는 현실에서, 국가보안법이 수호한다는 안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또한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는 태도다. 이를테면, “모든 여성들은 치마를 입어야만 한다”라는 법이 제정됐다고 치자. 원래 치마를 즐겨 입던 사람들이라면 별 피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법이 악법이 아닌 것이 되나? 치마와 바지를 골라 입을 자유는 어디로 간 것인가? 이처럼, 국가보안법은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당장 트위터만 해도, 이제는 정말 별 거 안 해도 구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트위터러들을 옥죄어 자기검열을 강요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이야기는 아니지만, 필자는 2007년 대선 직전에 인터넷에 제목은 “ㅇㅁㅂ = 단세포”, 내용은 “아메바는 단세포 생물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가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서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이후, 선거 때 까지는 인터넷에 어떤 글도 쓰지 않겠노라, 라고 마음먹었다. 아메바의 2차 습격이 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표현의 자유는 이렇게 훼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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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3일, 대한문 앞. '뉴타운 간첩파티'에서.


얼마 전에 간첩단 조작 사건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십년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았던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무죄가 선고됐고, 뒤이어 국가가 그들에게 110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국가보안법은 이렇게 ‘국가안보 수호’라는 명분 아래, 개인들의 삶을 파괴한다. 박정근 역시 압수수색 이후 불면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스트레스성 장애를 호소했고, 자신의 사진관과 방에 가는 것도 두려워했다고 한다. 구속되어 있는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다. 개인의 삶을 이렇게 파괴하는 법이 존재하는 것이 온당한가? 일찍이 김수영 시인은 “김일성만세”라는 시에서, 표현의 자유를 인정치 않는, 우리 나라가 채택하고 있다는 ‘자유민주주의’의 모순을 이야기했다. 김수영의 그 시를 인용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다시 한 번 외쳐본다. 그리고 오승희, 이적표현물 아니에요. 좀 불순하긴 해도…….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 밖에


'김일성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 밖에


- 김수영, 196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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