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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서평

(2012.06.22 작성)


공교롭게도, 이 제목을 가진 언니네이발관의 노래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악마를 대적하는 게임을 만나게 됐다. 서사구조는 간단했다. 게임 플레이어는 그저 캐릭터를 열심히 움직여 인류를 위협하는 악마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면 어느새 레벨이 올라있고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게임을 하다가 몇 가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것은, 최장집이 지적하고 있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 정치의 문제점들과 묘하게 통한다.


‘악마를 대적한 자는 악마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게임의 이야기를 가장 잘 설명한 문장이리라. 악마를 대적한 자가 왜 악마가 되는가? 그것은 승자독식, 다시 말해 동심원적 중앙집권화가 만들어낸 거대한 중앙권력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악마를 대적한 자 스스로는 그 권력을 자신이 제대로 제어할 수 있으며, 이 권력을 이용해서 무언가 이상적인 일을 해볼 수 있겠구나, 싶었겠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장집의 모든 문제의식은, 결국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보면, 여전히 해체되지 않은 왕조국가적 봉건성을 겨누고 있다. 왕조국가에서는 정당정치가 존재할 이유가 없었고,민의가 제대로 반영될 필요도 없었으며, 공론장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조선에서 붕당정치가 이루어지면서 공론과 논쟁 및 협의의 정치가 이루어졌다고 국사책에서는 애써 긍정해보고 있지만, 실상 조선의 붕당정치가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것은 어떤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 단지 사회 기득권층끼리의 파벌다툼이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양당구도처럼.


하버마스 이래, 공론장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이 존재했고, 그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론장이 존재함으로써 숙의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갈등과 논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왕조국가적 봉건성이 엄존하는 상태에서는, 이미 만들어져있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가 폭압으로 눌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에 그런 어색함과 두려움과 한계선이 내재되어 있다. 제도는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어련히 잘 알아서’ 만들었겠거니, 할 따름이다. 4월과 6월의 혁명, 그리고 개헌, 이 과정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들어갈 최상위법에 대해 얼마나 논의가 됐는가? 여기에 ‘민주주의’의 ‘진짜 민’의 뜻은 얼마나 반영되었는가? 협의와 소통에 의한 정치, 아니 그냥 정치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었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제도에 대한 비판이나 진지한 논의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 자리에 올라가서 바꿔라”라거나 “악법도 법이다”라는 논리가 통용된다.


공론장은 채 열리지도 못했고, 따라서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경험은 해보지도 못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성 원리’ 같은 것은 애저녁에 차단되었다. 노무현이 “공산주의도 포용할 수 있어야 진짜 민주주의”라고 말했다가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던 것을 기억한다. 어떤 진지한 논쟁이나 개인적 선호의 표출 없이 ‘짜장면으로 통일하는’ 문화, ‘알아서 기는’ 문화 속에, 민주주의는 ‘위임 민주주의’로 전환됐다. 문제의 핵심은 ‘누가 권력을 쥐는가?’에 몰린다. “이명박은 물러가라!”라는 구호 속에서 또다른 아이단이 영혼석을 이마에 박아 넣을 궁리를 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정치’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의 ‘복수성’은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관계망이 아니라, 상명하복적이고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성리학적 명분에 따른 관계망일 따름이다.


최장집은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역시 제도 개혁 중심의 대책을 제시했다. 물론 제도가 선도하고 의식이 따라가는 식의 개혁도 있을 수 있지만, 의식이 먼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의 제도 개혁이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이를테면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할 경우, 오히려 다선의원들의 ‘생존률’이 매우 높아지고 정치 신인들의 참여가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그 제도 속에서 기능하는 정치의 구조다.


그렇다면 의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닌가? 언론학자이자 운동가인 원용진은 ‘틈새 찾기’에 주목한다. 사회 속에서 억압되는, 혹은 배제되는 소수자들의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솟구친다면, 결국 이를 외면할 수는 없게 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물론 이런 방식 만으로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최장집이 “그 동력을 제도 정치권에 전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던 학생운동 또한 이러한 ‘틈새 찾기’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틈새 찾기’는, 그간 ‘운동’조차도 기존의 권력 피라미드를 답습하던 것에서 완전히 탈피한, 소수자들의 당사자운동과 그 운동들 사이의 연대, 즉 ‘복수성 찾기’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제도만 바꿔내려’ 했던 기존의 운동과는 아무래도 다르다.


디아블로를 쓰러뜨리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줄 인물은 어느 특출난 영웅 한두 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임을, 우리 스스로가 자각할 계기가 필요하다. 아니, 디아블로는 없다.목표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민주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정치라는 게임에 모든 이가 빠짐없이 참여하게 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으니, ‘서버접속에러37’ 걱정 말고 본격적으로 ‘정치’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민주화된 사회를 물려줘야 할, 우리의 의무다. 대천사 티리엘의 말을 인용해보자.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 내가 바로 정치다! 우리에겐 더 큰 숙명이 있다. 소외된 가치들을 지키는 것이지. 그러나 그 잘난 정치권력이 우리 모두를 얽맨다면, 이제 ‘피지배자’로 남지 않겠다.”

Posted by 세치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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