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2017.01.08 14:15

* 페이스북에 먼저 써놓은 것을 갈무리하는 차원에서 블로그에 옮김.


우선 '기자의 현장 개입'이라는 말의 정의부터 분명하게 해 둬야 하겠다. 사실 공개된 자료만 활용하(거나 묻혀 있던 자료를 발굴해서 쓰)는 경우와 같은 상황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취재활동은 현장의 인과관계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어떤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쓰면서 비판 대상에 연락을 취하게 되는데(반론권 차원에서건 더 깊은 취재 차원에서건), 여기서 이미, 기사가 나가기 전에, 어떤 '결과'가 나오곤 한다. "취재가 시작되자 A사 측은 문제의 게시물을 삭제한 뒤 사과문을 올렸다"라든가 하는 문장이 그런 것이다. 이것은 '개입'인가 아닌가?

굳이 구분하자면, '의도된 개입'이 있을 수 있고, '의도되지 않은 개입'이 있을 수 있고, '미필적 고의인 개입'도 있을 수도 있다. 가령 JTBC의 이번 정유라 체포 보도는 '의도된 개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앞서 적은 경우의 대부분은 '미필적 고의인 개입'에 가까울 것이다.

'의도된 개입'의 한쪽에 JTBC의 정유라 체포 보도와 같은 '정의로운' 개입이 있을 수 있는 반면에, 또 그 반대쪽에는 '지면 사유화'의 사례들이 있다. 특히나 지역 토호들이 미디어업을 겸영하는 지역언론의 경우에 그런 것이 심하다. 당연히 두 보도의 가치를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둘 다 '의도된 개입'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두 보도의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가?

기자협회 윤리강령을 보면 "엄정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만, 동시에 "기자는 자유로운 언론활동을 통해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해야 한다고도 돼 있다. 이는 "개인적인 목적에 영합하는" 것을 취재·보도하는 것이 아닌,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을 알릴 의무"에 부합하는 것을 취재하고 보도하라는 뜻이다. 무엇이 '민주화에 기여'하는 방향인 지는 기자(와 데스크)가 판단할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저널리즘 문제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언론인의 양심'에 맡길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인 것이다.

참 진부한 결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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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2016.11.20 00:21

집회 현장에 나가다 보면 어쩐지 낯이 익은 사람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을 만날 때도 있고,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집회에 나가다 보니 한두 번씩 계속 마주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보통 드는 감정은 '반가움'인데, 가끔 '이런 사람을 이런 데서?!'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다. 그러면 '반가움'은 몇 배가 된다.

지난주에는 서울에서 100만 명 넘는 사람이 모였고, 이번 주에도 서울 60만 명을 포함해 전국에서 1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전주에 있던 나는 오늘도 '반가운' 얼굴을 여럿 보았고, 관통로 사거리에 쏟아져 나온 1만여 명이 한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모습에 약간 든든함 같은 것도 느꼈다. 이번에는 "혐오발언을 그만두라"와 같은 목소리도 나왔고, 많은 시민이 여기에 동의의 뜻을 보냈다.

안타깝게도 이번 주에도 별로 바뀌는 것은 없을 전망이다. 청와대는 호시탐탐 반격의 기회만 노리는 듯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여전히 퇴진할 생각이 없으며, 일부 사람들은 JTBC의 취재장비를 박살 냈으며, 시민들은 '얌전'했다. 경찰차벽을 '꽃벽'으로 만들자며 붙인 스티커를 도로 떼는 모습도 나왔다. 여기에 어떤 '답답함' 내지는 '허탈함'을 느끼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1960년의 혁명은 3·15 부정선거에서 시작됐다. 이승만이 '하야'하겠다 한 것은 4월 26일이었다. 최루탄과 돌멩이가 날아다니고 경찰서 유리창이 성할 날 없던 격렬한 시위가 무려 한 달 넘게 지속되고서야 마침내 시민들이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 1987년의 혁명 또한 5월 말부터 장장 한 달여에 걸친 긴 싸움 끝에 6월 29일에 신군부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전개였다.

2016년, 10월 말에 불붙은 싸움은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첫 대규모 집회가 11월 5일에 있었고 11월 12일과 11월 19일에 연이어 100만 명씩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뭔가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그 가운데서 우리는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안남시민연대'나 '범야옹연대' 같은 깃발로 우리 자신을 확장해 가고 있고, 다른 동료시민을 배제하는 '혐오발언'들을 차단해 가고 있다.

한 주 한 주, 이런 '숫자놀음'에 불과한 '평화집회'로 뭘 바꿀 수 있겠냐는 우려도 크다. 답답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원래 느리다. 지극히 느려터졌고 또 지극히 비효율적인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그런 사상을 우리가 신봉하는 이유는 바로 저 많은 동료시민들을 배제하지 않기 위함이고, (아직까지는)민주주의만이 그것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굳이 '비폭력', '평화' 프레임 속에 갇혀있을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어떤 '순수함'이나 '고결함' 같은 것에 목을 맬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냥 시민이다. 그냥 그렇게 있는 존재다. 누가 감히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모습' 같은 걸 요구할 수 있나?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을 다만 권력자는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폭력'과 '평화'를 주장하는 저 광장의 시민들을 비웃을 이유 또한 없다.

정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돌멩이나 쇠파이프 따위가 아니다. 공권력을 독점하고 있는데 고작 그런 게 무서울 거리나 될 수 있나. 저들에게 진정 두려운 상황은 자신들이 고립되는 것이다. 어딜 가도 자기편이 없는 것. 어느 누구도 자기들을 반가워하지 않는 것. 자기 반대편 사람들은 저렇게 많이 나와서 서로 뜻을 공유하고 반가워하는 것. 그것이 어느 임계점을 넘어 더는 그냥 묻고 넘어가기 어려워지는 것. 그것이다.

우리 동료시민을 더 믿자. 저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을 하자. 한 사람이라도 더 광장에 나오게, 그리하여 '반가움'을 느끼게 하자. 한 번의 시위로 끝나지 않는다면, 친한 사람의 손을 잡고, 혹은 '안남시민연대' 같은 자기가 좋아하는 아무 깃발이나 붙들고 광장으로 다시 가자. 조금만 더 '답답'하게, 때로는 '별로 얻어내는 것도 없'는 듯, 또 때로는 '단지 놀러 나온' 듯, 그럼으로써 더 많은 동료시민과 함께 할 수 있게, 그렇게 갈 수 있으면 좋겠다.


* 추가: 경찰차벽의 스티커를 떼는 행동이 비판받을 지점은 '경찰에게 씨알도 안 먹힐 포용 같은 걸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시민의 의사표현을 멋대로 철회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의견의 영역이고 후자는 타인의 (딱히 폭력적이지도 않고 남을 배제하지도 않는)의견 표현을 가로막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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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2015.09.14 22:12

13일 늦은 시각에 노사정위원회는 '일반해고 도입'을 비롯한 많은 소위 '노동개혁'안에 합의했고, 14일 한국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이를 승인했다. 비록 '중장기과제'로 넘겨져, 당장 연내에 도입되거나 할 성격의 것은 아니나, '일반해고 도입'은 이제 기정사실화된 셈이다.

'일반해고' 도입은 '저성과자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논의된 것이지만, 사실 이것은 '성과'에 한정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성과'가 뭔지, 그걸 어떻게 측정하는지, 그것에 필요한 직무능력은 무엇인지 등등, 한국의 기업들이 저 중에 관심이라도 갖고 있는 게 있었던가. 성과관리보다는 '비용최소화'라든지, 어떤 정치적 목적(이를테면 노조분쇄랄지)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뜯어보면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일단 '성과'라는 것을 기업이 평가해서 자를 수 있도록 칼자루를 주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임금(기업 입장에서는 '인건비')은 기업에게는 '줄일 수 있는 비용'의 문제지만 노동자에게는 '생존' 그 자체의 문제다. 사회적 안전망은 허술하다. 최근 국회예산정책처에서 나온 '부문별 사회복지지출 수준 국제비교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공공사회복지지출 수준은 OECD 회원국 중 비교대상 30개국에서 당당히 30위를 차지했다. 부문별로도 노령부문이면 노령부문, 근로무능력부문이면 근로무능력부문, 실업부문이면 실업부문 죄다 최하위권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러니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저성과자'라는 잣대를 가지고 고용 지속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온전히 기업에게 준다는 것 자체가, 노동자로서는 생사여탈권을 위임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경험적으로 한국의 기업들이 대체로 실제 성과와는 관계 없이 '싹싹하지 않은' 사람을 우선 자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1순위는 물론 노동조합 혹은 그에 준하는 움직임을 보인 노동자일 것이다. 또는 단지 상사에 밉보인 사람이 찍혀 해고당할 수도 있다. 그건 내가 될 수도 있고 당신이 될 수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일을 잘하고 못하고와는 관계 없는 일이다.

이와 함께, 알다시피 한국은 이미 노동자의 지위 자체가 대단히 불안한 나라 중 하나다. 지난 7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주최로 열린 '노동시장 유연·안정성 확보 방안' 토론회에서 금재호 한국기술교육대 교수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OECD 회원국 중에서 노동자 근속기간이 가장 짧은(5.6년)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육아휴직이나 출산 전후 휴가를 다녀와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여성 노동자가 2만6755명인 나라이며, 쌍용자동차와 KTX 승무원의 전례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특히 쌍용자동차의 경우에는 정리해고 요건인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억지로 꾸며내느라 서류를 조작한 정황이 확인됐음에도 법원에서 해고가 인정된 사례다.

근로기준법 상 해고 요건은 '정당한 이유'(제23조), 그리고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제24조)로 돼 있다. 이 '정당한 이유'의 폭은 그간 꾸준히 넓어져왔다. 설령 '부당해고'라 하더라도, 노동자 개인이 이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부당해고' 판결을 받아내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며 비용도 만만치 않다. 정리해고 역시 지금 당장 '긴박'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그럴 것 같다는 추정만으로도 가능하게 된 상태다. 꼭 '해고'가 아니어도 권고사직, 희망퇴직, 또는 지속적인 괴롭힘을 통한 퇴직 유도 등등 많은 방법이 있고, 현재 그렇게 해서 많은 노동자들이 잘려나가고 있다. 그렇다. 이미 해고는 충분히 쉽다.

'합의' 같은 개념이 나오는 건 그래서 당연한 것이겠으나, 노조 조직률 OECD 최하위(10.3%)에 빛나는 한국에서 노사간의 '동등한' 합의라는 게 가능할까? 소위 '강성노조'를 가진 일부 대형 사업장을 제외하면, 그냥 '무조건' 사측의 입맛대로 취업규칙이 변경될 것이다. 취업규칙을 노동자에 불리하게 변경하는 조건을 완화한다는 얘기는 그래서 끌고 온 것일테다.(근로기준법상 취업규칙을 노동자에 불리한 방향으로 고치는 것은 노동조합이나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일반해고'가 도입되면, 다시 말해 '성과평가'를 빌미로 노동자를 마음껏 해고할 자유가 기업에 주어지면, 노조가 망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의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나빠질 것이다. '성과평가'가 기다리고 있는데 성폭력, 성차별에 항의나 할 수 있겠나? 다른 소수자의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몸이 아픈 사람은 '성과를 낼 수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쫓겨날 것이다. 저항 수준도 못 되는, '업무상 직언' 같은 것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육아휴직은 이제 '사라진 제도'가 될 것이며, 병가 같은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건 '기준'이나 '합의'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해고'라는 요목이 생긴다는 것 자체만으로 벌어질 일들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한 제도라는 게 뭐가 있나? 이번 '노동개혁' 논의에서 나온 것이라곤 고작해야 실업급여 약간 늘린 것(수급기간 30일 연장, 급여는 직전 3개월 평균임금의 60%로 10%p 상향)이 전부다. 일자리와 관련해서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라든지, 비정규직 기간을 4년으로 늘린다든지 하는, 말장난 같은 정책이나 밀고 있다. 다 놔두고, 해고 난도와 취직 난도를 비교해보자. 어느 것이 쉽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무슨 '유연화'를 논한단 말인가?

물론 해고 난도가 낮아지면서 기업이 일시적으로 채용 규모를 늘릴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다. 또는 '늘어난' 그 자체가 신기루일 수도 있다. 무슨 '졸업정원제'마냥, 취직 난도는 조금 낮아지는데 몇 년 못 가 대부분이 다시 잘려버리는 경우가 일반화될 수도 있다. 10명이 입사해 1년 뒤 2명만 살아남는다거나 하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다. 어쩌면, 오히려 실직자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한 이후로는 신규 채용은 아예 멸종할 수도 있다. 경력직이 넘쳐나는데 왜 신규를 쓰겠는가?

결국은, 그렇다. 소위 '노동개혁'이란 것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는 일시적이거나 허당일 것이고, '부정적 효과'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으로 노동자 모두에게 다가올 것이다. 애석하게도 당신이 금수저 은수저가 아닌 이상, 우리 대부분은 노동자로서 평생을 살아야 할 운명이다. 따라서 우리 대부분은 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협'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해고' 도입 이후의 우리 대한민국 노동자에게는 이제 두 가지 길만 남게 될 것이다. 탈출이냐, 죽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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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2014.08.02 14:19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그래도 하긴 해야겠다.

미디어오늘의 박효도선생 관련 기사,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실망이다. 그것도 어느 '닷컴' 언론사나 무슨무슨 '온라인뉴스팀' 같은 게 아닌, 미디어오늘 씩이나 되는 매체에서 이런 기사가 나왔다는 것이 실망이다.

'공인이론'에 따르면 '공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프라이버시는 직무에 관련이 있는 한 어느 정도까지는 침해가 용인된다. '공인'의 범주는 아주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개 '(5급 이상의)고위 공직자', '사회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사건의 주요 관련자' 정도로 이야기된다. 다만 '사회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까봐야 사회적으로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적기 때문에, 공직자나 사건 관련자와는 또 다른 기준을 적용 받는다.

박광온은 일단 공인이다. 이제 국회의원이 됐기 때문에 '고위 공직자'이며,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그에 관한 많은 많은 정보들이 공개가 됐다. 그렇기 때문에 박광온 본인은 빼박can't 공인이며, 그의 프라이버시는 일정 정도 제한된다. 그의 프라이버시가 제한될 수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수원시 영통구 주민들이 뽑은 '대의'이면서 대한민국의 헌법기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 국회의원의 가족을 '공인'으로 봐야 하는가, 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채동욱 혼외자 의혹이 제기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조선일보의 보도를 비난했다.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의 직무와는 별 관련 없는 '신상털기'일 뿐이라는 점에서였다. 유병언, 유대균과 관련한 종편의 아무 의미 없는 '신상털기' 기사 또한 강한 비판을 불러왔다. 미디어오늘이 이를 비판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박효도씨는 미디어스 인터뷰에서 "본인이 공개를 원하는 한도 내에서 자기소개를 해주신다면"이라는 질문에 "30대 직장인이고, 인디밴드에 소속된 공연기획자이다"고 답했다. 그가 '공개를 원하는 한도'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SNS를 통해서 신상 공개를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심지어 기사 내에도 "박효도씨는 지난달 31일 미디어오늘과 이메일 인터뷰에서 나이와 관련한 물음에는 답변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최소한, 박효도씨가 왜 자신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을 거부했는지에 대한 고민은 있었어야 했다. 단순히 "왜 그렇게 말했을까?"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됐다. 물론 그는 '왜 그랬는지'를 공개한 적은 없지만, 그가 SNS에 올린 글의 내용과 앞선 미디어스의 인터뷰 기사("부모의 삶과 나의 삶이 최대한 분리되기를 바라던 내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완전분리가 불가능하기에 내가 의도적으로 분리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로 추정컨대, 그는 '국회의원 가족'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지키길 원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미디어오늘의 보도를 통해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이름과 나이가 공개됐으니, 공개된 내용을 조합해보면 박효도씨의 신상을 특정할 수 있게 되고, 신상이 특정되면 그는 '국회의원 가족'의 삶으로 묶여버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 나라에서 '국회의원 딸'로 알려진 사람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겠는가.(박효도씨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보라서 다행'인 경우는 흔치 않을 것이다)

물론 국회의원의 가족이니 어떤 루트를 거치면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의원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의원실의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있겠고, 그것도 아니라면, 박 의원에 관한 자료를 뒤져보면 어딘가에 나오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일반적으로 접근하기 힘든 루트의 정보가 '이미 공개된 정보'라고 부를 수 있는 정보인가? 더군다나 박효도씨 본인이 이미 신상 공개를 거부한 마당에, 굳이 그걸 밝혀 보도해야만 하는 어떤 당위라도 있었던 것인가? 혹여 박효도씨가 이름과 나이를 감춰서 비리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인가?

미디어오늘과 기자가 악의를 품고 해당 기사를 올렸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 내용이었을 수도 있고, 일단은 확인절차를 거친 것으로 보이니 그 나름대로 의무는 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소 선정적으로 보이는 제목도, 기사를 올리는 편집기자의 과욕이었다고만 생각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악의 없고 절차적으로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것도 어떤 경우에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언론, 그것도 매체비평지의 입장에서는.

미디어오늘의 존재가치는 대단하다. 우리 나라 언론 환경에서 몇 안 되는 제대로 된 매체비평지이자, 사회 전반에 대해 끝없는 관심을 유지하는 좋은 언론사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일에 더더욱 실망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박효도씨 본인에 대한 사과와 함께 기사 내 신상정보를 삭제하는 정도의 조치는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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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2014.04.17 23:05

'기레기'라는 단어가 보편화하고 있다. '기자'+'쓰레기'다. 그냥 딱 봐도 기자를 욕하는 단어임에는 틀림 없어 보인다.

낚시 기사, 최소한의 사실 확인도 없는 성의 없는 기사, 그냥 막 우라까이(보고 베낌)해대는 기사 등을 양산하는 기자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진상은 '충격 고로케'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사이트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그냥, 큰 재난이 일어났을 때 언론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니 확인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1993년, 292명이 숨진 서해 훼리호 사고 때에도 기레기질은 유별났다.

그 당시 기레기질 중 압권은 단연 '비겁한 선장' 보도였다. 당시 언론에는 선장이 혼자 도망쳤다는 보도가 돌았다. 최초 보도는 한겨레신문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비슷한 기사를 써내는 것은 조중동이건 지역언론이건 뭐건 똑같았다.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내용은 그를 목격했다는 사람의 말에서 나온 것인데, 사실 이 진술 말고는 선장이라는 사람이 도망쳤다는 어떤 근거도 찾을 수가 없었다. 찾을 수가 없으니, 찾아야지. 그래서 수배령도 떨어졌다.

나중에 선체가 인양된 뒤에, 혼자 승객 버리고 도망쳤다는 그 선장은 배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당시 창간 직후의 무명신문이었던 내일신문이 선장은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도해서 주목을 받았었다) 그리고 훼리호 사고가 일어났던 10월 10일을 사람들은 '언치일'이라고 불렀다. 사실 확인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보도들은 조롱으로 되돌아왔다.

기레기는 죽지 않았다. 20여년의 세월을 건너, 오히려 더 왕성해졌으면 왕성해졌지, 결코 죽지는 않았다.

동일본 대지진 때에도(1면에 떡하니 '일본침몰'이라고 박아넣는 그 역겨움이란!), 마우나오션리조트 강당 붕괴사고 때에도(어떻게 구조를 기다리는 피해자의 얼굴을 1면에 실을 수가 있지?) 우리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서 화를 냈었다.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마우나오션리조트 강당 붕괴사고 때는 내가 기자가 된 이후였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났다.

그래도 그 화 난 정도가, 2014년 4월 16일, 바로 어제만큼은 아니었다. sk텔레콤 광고기사 같은 건 차라리 화도 안 난다. 그 따위 어뷰징은 아예 가치판단의 척도를 벗어난 것이니, 그냥 논외로 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해자의 노트를 꺼내 사진을 찍어 올리는 기자, 생방송으로 인터뷰하면서 친구가 죽었는데 어떤 기분이냐고 묻는 아나운서, 누구는 타이타닉을 꺼내오고 누구는 해난사고 사망자수 랭킹을 내고, 또 누구는 사람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보험금을 계산하고... 이런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기자라는 것이, 이런 일을 하는 존재였다.

응답하라 1994가 유행이었다. 성공의 요인을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분석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불러내고 싶었던 1994는 낭만이었을 것이다. 그 1994에 딱 1년 앞선 1993년, 기자들이 불러낸 1993은 '언치일'이었다. 기레기 기레기, 이 단어도 정말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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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치
오피니언2014.03.05 22:56


▲ 이 사진 최초 출처가 어딘지 모르겠다. 구글 이미지검색을 해도 이상한 것만 나오고...

일본어대 오덕 플래카드가 화제다. 상당히 비상한 관심을 얻었지만, 그 플래카드를 두고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과연..."(아마도 "사스가..."가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정도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는 '일본어=오덕'이라는 관념 속 공식 때문일 것이다.

플래카드 사진을 보고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신기한' 지점이 의외였다. 내용을 보고 신기해할 줄 알았는데, 플래카드 하단에 적인 '일본어대 비상대책위원회'라는 명의를 보고 신기해한 것이다. 뭔가 제복 입은 사람들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어야 할 것 같고, 뜬금없이 군복 입은 김준현이 나와서 "고래~?" 할 것 같고, 그런 느낌인데 일개 단과대학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 신기한 것이다.(아마도 그런 심각한 느낌의 이름을 하고서 '모에모에'를 말한 것이 더 신기했을 것 같긴 하다.)

사실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기구 이름을 처음 봤을 땐 나도 참 신기해했었다. '비상'이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예사롭지 않음'이다. 일상의 예사로움을 깨뜨리는 상황이란 '뜻밖의 긴급한 사태'를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국어사전의 정의도 그렇게 돼 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상정하고 있는 '예사로운 상황'이란 당연히 학생회가 정상적으로 세워져서 제대로 굴러가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선거 무산으로 학생회가 세워지지 못했으니 '비상'인 것이다.

'비상대책위원회'가 이제는 신기하지 않다. 아마 나 뿐 아니라 학생회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비슷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비상대책위원회가 너무 흔해서'다. 총학생회 11월 선거는 3년 연속 무산됐다. 중운위 성원의 절반이 비대위장으로 채워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바꿔 말하면, '비상'이 더 이상은 '비상'이 아닌 것이다. 학생회 선거가 온전히 정상적으로 치러져 학생회가 제대로 세워지는 상황 자체가 귀해진 것이다. 대통령이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개념을 계속 유행어로 밀고 있는 것처럼, '비상'이 '정상화'된 것 같은 느낌이다.

'청년들의 정치 무관심이 문제다' 같은, 생각을 반쯤 하다 만 것 같은 분석은 아무 의미도 없다. 애당초 '열성적인 공중'의 규모는 얼마 안 된다. 지방선거 때 뽑는 자기 지역 기초의원 이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청년이건 장년이건 노년이건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만 관심 있는 거다. '왜 저 부동층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주입하지 못하냐'지, '왜 저들로 하여금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했느냐'가 아니다. 학생회 선거가 계속 무산되고 있는 현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까내릴 문제는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비상'의 '정상화'를 일단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냥 체념해버리자는 뜻이 아니다. '학생회장단이 출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뭔가를 계획하려 하지 말고, 그냥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에서 '할 일'을 시작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어차피 매년 '비상대책위원회'를 세워야 한다면, 그 선출 절차를 최대한 민주적으로 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 같은 것을 만들면 어떠냐는 것이다. 대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어떻게 적절히 '집단지도체제'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면 어떠냐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공간'으로 수렴한다. 하다못해 공강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가서 그냥 앉아서 홍차나 한 잔 마시면서 오늘 무슨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가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 하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라도 할 수 있는 공간. '동원'되지 않고 '강제'되지 않는 개인들이 적당히 자기 햄스터볼을 유지하면서 있을 수 있는 공간. 학우들이 '어디서' '뭘 하면' 편안함을 느낄지, 어떻게 하면 그 편안함을 유지하면서 정치의 영역을 발동시킬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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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2013.07.30 16:42

『언니들, 집을 나가다』에 관한 감상문(혹은 신세한탄)

7월 25일, "가장 보통의 언니" 세미나

주말에 본가에 다녀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불쑥불쑥 방 문을 열고 잔소리를 하는, 주변의 ‘자식 취직시킨’ 사람들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신세한탄을 하는, 밀린 집안일을 몰아 시키는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아직, 결혼 이야기는 안 나오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취직, 취직, 취직,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 잔소리가 멎을 때쯤이면 결혼 드립이 자연히 그 뒤를 잇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한다.

아직도, ‘가족’과의 거리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어느 정도의 거리가 적당할지 모르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온 이래 쭉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고는 있지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상태기 때문에 마냥 ‘독립’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안부전화를 하면, 으레 잔소리를 뒤집어쓰기 마련이다. ‘내가 대체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전화를 했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부모님은 내게 그런 잔소리를 하는 것이 자신들의 ‘부모 된 도리’라고 생각할테지만.

사실 여기에는 내 책임도 있다. 어떻게 해서든 경제적인 예속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였겠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정신 없다는 핑계로 그러지 못했다. ‘의존’이 주는 안온함에 젖어들어버린 것이 큰 잘못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부모님의 잘못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고향 전주를 떠날 때까지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문제라고는,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것들이거나, 혹은 그들에게는 별 관심 없던 것들이었다. 결국 나는 ‘홀로 설’ 준비라고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상황 논리에 따라’ 어영부영 반(半)독립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공간이라는 것이 반드시 ‘혈연관계’ 혹은 ‘법률적 관계’여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든다. 그 ‘혈연관계’에서 편안함은커녕 오히려 하루하루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고, ‘법률적 관계’가 당사자들의 관계를 영원불멸한 것으로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우리가 지금 이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그 ‘정상가족’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얼마나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언니들, 집을 나가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너 혼자 살 수 있겠어?”라며 ‘독립’을 ‘폄훼’하는 시선과 목소리들이다. 딱 그 정도가, 우리 나라에서 ‘정상가족’ 밖에서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다. 특히나 여성에게는 이 쓸데없는 오지랖의 강도가 몇 배는 더 강해진다. "외로우면 어쩌려고", "병에 걸리면 어쩌려고", "도둑 들면 어쩌려고", "집에 그래도 남자는 있어야지"... 아니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는데 그걸 대체 왜 신경 쓰고 있는 건데?! 게다가 우리 나라에서의 전통적인 ‘정상가족’에서는, 여성은 ‘외로움 해소’나 ‘병 수발’ 같은 ‘서비스’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그 ‘의무’를 지는 입장 아닌가. 그런 것을 왜 남에게 강요하는 건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각자가 모두 ‘온전한 개인’일 때 성립하고 유지될 수 있다. 그 ‘온전한 개인’을 만드는 것은 바로 ‘공간’이다. 편안한 불가침의 공간 속에서 개인은 비로소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정립하며 온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혈연으로, 법률로 구속되는 ‘정상가정’은, 너무나 쉽게 개인을 그 관계 속에 매몰시켜버리곤 한다. 그렇게 누군가의 위력으로, 의존관계로, 위계서열로 유지되는 관계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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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2013.02.01 14:01

최장집 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서평

(2012.06.22 작성)


공교롭게도, 이 제목을 가진 언니네이발관의 노래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악마를 대적하는 게임을 만나게 됐다. 서사구조는 간단했다. 게임 플레이어는 그저 캐릭터를 열심히 움직여 인류를 위협하는 악마들을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면 어느새 레벨이 올라있고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게임을 하다가 몇 가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들을 만난다. 그리고 이것은, 최장집이 지적하고 있는, 민주화 이후의 한국 정치의 문제점들과 묘하게 통한다.


‘악마를 대적한 자는 악마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 게임의 이야기를 가장 잘 설명한 문장이리라. 악마를 대적한 자가 왜 악마가 되는가? 그것은 승자독식, 다시 말해 동심원적 중앙집권화가 만들어낸 거대한 중앙권력을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악마를 대적한 자 스스로는 그 권력을 자신이 제대로 제어할 수 있으며, 이 권력을 이용해서 무언가 이상적인 일을 해볼 수 있겠구나, 싶었겠지만, 현실은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최장집의 모든 문제의식은, 결국 극단적으로 단순화시켜보면, 여전히 해체되지 않은 왕조국가적 봉건성을 겨누고 있다. 왕조국가에서는 정당정치가 존재할 이유가 없었고,민의가 제대로 반영될 필요도 없었으며, 공론장 따위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조선에서 붕당정치가 이루어지면서 공론과 논쟁 및 협의의 정치가 이루어졌다고 국사책에서는 애써 긍정해보고 있지만, 실상 조선의 붕당정치가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것은 어떤 계급적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라 단지 사회 기득권층끼리의 파벌다툼이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지금의 양당구도처럼.


하버마스 이래, 공론장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이 존재했고, 그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론장이 존재함으로써 숙의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합의가 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갈등과 논쟁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왕조국가적 봉건성이 엄존하는 상태에서는, 이미 만들어져있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가 폭압으로 눌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에 그런 어색함과 두려움과 한계선이 내재되어 있다. 제도는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이 ‘어련히 잘 알아서’ 만들었겠거니, 할 따름이다. 4월과 6월의 혁명, 그리고 개헌, 이 과정에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들어갈 최상위법에 대해 얼마나 논의가 됐는가? 여기에 ‘민주주의’의 ‘진짜 민’의 뜻은 얼마나 반영되었는가? 협의와 소통에 의한 정치, 아니 그냥 정치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었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제도에 대한 비판이나 진지한 논의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 자리에 올라가서 바꿔라”라거나 “악법도 법이다”라는 논리가 통용된다.


공론장은 채 열리지도 못했고, 따라서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과 대립을 일으키는 경험은 해보지도 못했다. ‘사상의 자유시장성 원리’ 같은 것은 애저녁에 차단되었다. 노무현이 “공산주의도 포용할 수 있어야 진짜 민주주의”라고 말했다가 언론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던 것을 기억한다. 어떤 진지한 논쟁이나 개인적 선호의 표출 없이 ‘짜장면으로 통일하는’ 문화, ‘알아서 기는’ 문화 속에, 민주주의는 ‘위임 민주주의’로 전환됐다. 문제의 핵심은 ‘누가 권력을 쥐는가?’에 몰린다. “이명박은 물러가라!”라는 구호 속에서 또다른 아이단이 영혼석을 이마에 박아 넣을 궁리를 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정치’가 일어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의 ‘복수성’은 소통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적 관계망이 아니라, 상명하복적이고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성리학적 명분에 따른 관계망일 따름이다.


최장집은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역시 제도 개혁 중심의 대책을 제시했다. 물론 제도가 선도하고 의식이 따라가는 식의 개혁도 있을 수 있지만, 의식이 먼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의 제도 개혁이 큰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이를테면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할 경우, 오히려 다선의원들의 ‘생존률’이 매우 높아지고 정치 신인들의 참여가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그 제도 속에서 기능하는 정치의 구조다.


그렇다면 의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닌가? 언론학자이자 운동가인 원용진은 ‘틈새 찾기’에 주목한다. 사회 속에서 억압되는, 혹은 배제되는 소수자들의 운동이 여기저기에서 솟구친다면, 결국 이를 외면할 수는 없게 될 것이라는 시각이다. 물론 이런 방식 만으로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최장집이 “그 동력을 제도 정치권에 전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던 학생운동 또한 이러한 ‘틈새 찾기’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틈새 찾기’는, 그간 ‘운동’조차도 기존의 권력 피라미드를 답습하던 것에서 완전히 탈피한, 소수자들의 당사자운동과 그 운동들 사이의 연대, 즉 ‘복수성 찾기’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제도만 바꿔내려’ 했던 기존의 운동과는 아무래도 다르다.


디아블로를 쓰러뜨리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줄 인물은 어느 특출난 영웅 한두 명이 아니라 우리 모두임을, 우리 스스로가 자각할 계기가 필요하다. 아니, 디아블로는 없다.목표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민주화라는 과정을 통해서 정치라는 게임에 모든 이가 빠짐없이 참여하게 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으니, ‘서버접속에러37’ 걱정 말고 본격적으로 ‘정치’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에 민주화된 사회를 물려줘야 할, 우리의 의무다. 대천사 티리엘의 말을 인용해보자. “누가 나를 지배하는가? 내가 바로 정치다! 우리에겐 더 큰 숙명이 있다. 소외된 가치들을 지키는 것이지. 그러나 그 잘난 정치권력이 우리 모두를 얽맨다면, 이제 ‘피지배자’로 남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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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치
오피니언2013.02.01 13:41
(2012.03.07 작성)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귀를 찢는 폭발음이 들리고 화약 냄새가 사방에 진동한다. 몸과 몸을 묶고 결연히 막아서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끌려나간다. 비명소리가 울리고, 방어선은 뚫린다. 이것은 어느 전쟁 소설에 나오는 장면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느 행정집행의 장면이다.


3월 6일 저녁 7시에,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를 발파해도 좋다는, 경찰의 허가가 떨어졌다. 이 소식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긴급히 전해졌다. 그 소식을 접한, 활동가들과, 두 명의 현직 국회의원과, 그저 끓는 무언가를 주체하지 못한 평범한 시민들, 등등이 포함된 많은 사람들이 새벽 첫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평일이라 쉽게 시간을 낼 수 없는 이들은 SNS에 열심히 관련 소식을 퍼나르거나, 후원금을 강정마을 후원회에 보내고 있다. 이들의 뜻은 하나, 구럼비를 폭약으로 부수려는 시도를 그만두라는 것이다.


구럼비 바위는 어떤 바위인가? 폭이 1.2km에 이르는 거대한 이 바위는, 한라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5만년에 걸쳐 만들어낸 자연 비경이다.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암반습지대로, 지질학적으로나 생태학적으로나 매우 보존가치가 높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물권보전지구이기도 하고, 제주 올레 제7길의 랜드마크이기도 하다. 바위 곳곳에서 용천수가 솟아하는 신비한 곳이기도 하며, 이 때문에 서귀포시 일대의 식수 문제를 책임지고 있기도 하다...


그 가치를 이루 다 읊어대기도 힘든 이 바위를, 단지 50여 명을 모아놓고 형식적으로 연 요식행사의 결과를 근거로, 그 효용성과 필요성이 매우 의심스러운 해군 기지(혹은 크루즈항)를 짓기 위해, 마을 주민 대부분과, 연대하기 위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수없이 다치게 하면서, 폭약 43톤을 들여 산산이 조각내려는 시도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의 비유를 따르자면, 이것은 백두산을 깎아 공항을 만들고 남산을 뭉개 시멘트 공장을 지으며 한강을 메워 고속도로를 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아니, 구럼비 바위가 그만한 '보존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라고 치자. 유니세프가 지정한 생물권보전지구도 아니라고 치자. 많은 곳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스펙'이 있지도 않다고 치자. 그렇다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아니다. 이 역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공사인 대림산업 측은 폭약 43톤으로 50일에 걸쳐 구럼비 바위를 부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근 강정마을 주민들과 전혀 협의되지 않은 일이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짓는데 정작 이해 당사자, 그러니까 강정마을 주민들의 의견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이해 당사자들과의 협의도 거치지 않은 일을, 제주특별자치도의 도지사와 도의회도 반대의사를 밝힌 일을, 어느 한 쪽의 독단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말이다.


2006년에는 군대까지 투입된 끝에 평택 대추리 주민들이 마을과 농토에서 쫓겨났다. 2009년에는 경찰의 무리하고 폭력적인 진압 끝에 사람 6명이 죽었다. 민주화됐다는 나라에서, 단지 원래 있던 그 자리, 그 곳에 살고자 하는, 그 단순한 욕구도 짓밟힐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대한민국 정부가 아주 잘 보여줬다. 그리고 또 하나,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문제가 이제 부각되고 있다. 2006년부터 우리 정부는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하며 해군기지를 지을 계획을 세워왔고, 이제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다. 구럼비 바위를 폭약으로 부수는 것은 그 과정 중 하나다.


구럼비 발파가 잘못된 이유는 무궁무진하다. 어떤 이는 생태주의적 차원에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평화주의적 차원에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경제적인 효과가 없다고 말하는 경제학자, 안보상의 이득이 불분명하다고 말하는 안보 전문가도 있다. 나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는 못 되기 때문에, 다른 이야기는 못하겠다.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는 다른 '잘 아는' 사람들이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사람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살아갈 권리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제발, 살게 두어라. 거기에도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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